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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페이스북의 창립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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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성장 과정

마크 주커버그는 1984년 뉴욕 답스 페리에서 치과의사인 아버지와 심리학 박사인 어머니의 둘째이자 유일한 아들로  태어 났습니다.

총 3명의 여자형제를 둔 마크 주커버그는 어린 시절부터 다재다능한 아이였습니다.

학창시절 수학, 물리분야에서 상을 받았으며 프랑스어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등을 쓰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펜싱팀의 주장으로 MPV까지 수상했던 그가 가장 좋아하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 했던 것은 컴퓨터였습니다.

그의 재능을 알아봤던 그의 아버지는 어린 나이의 마크 주커버그에게 아타리 BASIC 프로그래밍언어를 가르쳤고, 11살 때 마크 주커버그는 소프트웨어 개발자 데이비드 뉴먼 밑에서 개인 지도를 받으며 아버지 사무실에 직원 커뮤니케이션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12살 때 윈도우 3.1이 설치된 486 DX 컴퓨터로 가족을 위한 네트워크 서비스를 구축하기도 했습니다. 중학생 시절에는 모노폴리나 로마제국을 주제로 한 컴퓨터 게임을 제작하며 그의 프로그래밍 실력을 유감없이 드러냈습니다.

 

학창시절, 중학생이었던 마크 주커버그는 모노폴리나 로마제국을 주제로한 컴퓨터게임을 제작하였고, 고등학교 때 사용자의 음악 취향을

인식해주는 시냅스 미디어 플레이를 제작하였습니다. 당시 마이크로소프트 사와 AOL 같은 대기업으로부터 100만달러에 제작물을 구입하겠다는

제안까지 받았지만, 마크 주커버그는 웹에 무료로 자신이 개발한 시냅스 미디어 플레이를 개방하였습니다.

 

페이스매쉬 (Facemash)

 

버드 대학에 진학한 마크 주커버그는 입학 후, 먼저 코스매치라는 사이트를 제작하여 큰 인기를 얻습니다.

누가 어떤 수업을 듣는 지 한번에 알아볼 수 있는 사이트였고, 그 이후 엄청난 사이트를 제작하여 큰 유명세를 타게 됩니다.

바로 페이스매쉬 라는 사이트인데, 기숙사의 모든 여학생들의 사진을 해킹하여 이상형 월드컵과 같은 플랫폼을 가진

사이트였습니다. 무려 하루에 23,000명이라는 엄청난 접속자 수를 보여주었습니다.

마크 주커버그의 뛰어난 아이디어와 사이트 구축 능력을 보여주는 큰 계기가 되었던 사례입니다.

(물론 마크 주커버그는  하버드대학으로부터 근신 처분을 받게 됩니다.)

 

페이스북의 탄생

 

그는 자신의 뛰어난 프로그래밍 실력을 장난으로만 소진하지 않았다. 기말고사를 보기전에 직접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친구들이 그림에 대한 평을 쓰도록 유도하였는데 그는 친구들의 글들을 읽고 기말고사에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마크 주커버그는 자신의 컴퓨터 실력으로 자잘한 일들을 도와주면서 짭짤한 수익을 얻기도 하였다.

 

페이스매쉬 사건으로 마크 주커버그의 명성은 무척 높아졌었는데, 이에 관심을 갖은 윙클보스 형제는 마크 주커버그에게 '하버드 커넥트'를 제작하자고 제안했고 마크 주커버그는 이를 받아 들입니다. 그리고 후에 페이스북의 플랫폼이 될 '더 페이스북 (The Facebook)'을 제작했습니다.

이미 코스매치나 페이스매쉬를 제작하며 얻은 코드와 기술적인 문제의 해결방안을 마련한 상태인지라, 마크 주커버그는 쉽게 만들어 냈고 그 결과는 엄청났습니다.

처음에는 하버드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직접 사진과 프로필을 올리고 친구들과 공유하는 서비스로 제작하였는데, 더 페이스북의 런칭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오픈한 지 3주 만에 6,000명이 넘는 가입자와 타 학교 학생들의 이용 신청이 밀려왔습니다.

결국 2004년 2월에 서비스를 시작한 페이스북은 3개월 만에 무려 10만명의 가입자 수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폭발적인 성장덕분에  페이스북에 투자하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천만달러에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제안도 받을 정도였습니다. 

숀 파커와의 만남

여름방학이 되자 마크 주커버그는 그의 인생을 결정할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됩니다.

페이스북을 만든 친구들과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에서 함께 지내기로 한것이었습니다.

 

애플과 구글 같은 세계최고의 IT 기업들이 자리한 실리콘 밸리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팔로 알토의 방 네개짜리 집을 구한 마크 주커버그는 음악 서비스인 냅스터를 만들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숀 파커를 찾아갑니다. 냅스터를 그만 둔 숀 파커는 수십만명의 가입자를 확보한 인터넷 서비스를 만들었지만 자유분방한 그의 성격에 화가난 투자자들이 그를 회사에서 쫓아냈습니다.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의 가치를 꿰뚫어 보고 있던 숀 파커는 더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주커버그에게 사업에 대해서 도움을 줄 수 있다면서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이를 계기로 마크 주커버그와 숀 파커가 인연이 되어서 팔로알토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고 함께 의기투합하게 됩니다. 마크 주커버그와 다른 친구들은 사업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지만 숀 파커는 이미 실리콘 밸리에서는 유명인사였습니다. 마크 주커버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숀 파커가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투자자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실패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마크 주커버그는 숀 파커를 사장으로 영입합니다.

■숀 파커의 활약

숀 파커의 역할은 대학의 동아리 수준이었던 더 페이스북을 제대로 된 기업으로 탈바꿈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숀 파커와 마크 주커버그는 팔로알토의 집에서 함께 합숙을 하면서 사업을 더 확장시켰습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더 페이스북의 회원은 20만명을 넘어섰는데 마크 주커버그는 부모님의 도움을 얻어서 서버와 같은 각종 비용으로 8만 5천달러나 쓰게 됩니다. 사업의 성공을 확신한 마크 주커버그는 방학이 끝나도 하버드대학교에 돌아가지 않고 팔로알토에남아서 더 페이스북에 전념하기로 결정합니다.

 

사장으로 합류한 숀 파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실리콘 밸리에서 쌓은 폭 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투자자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페이스북은 늘어나는 사업자로 인해서 갈수록 불어나는 운영비를 충당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숀 파커는 당시 꽤 잘나가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인 링크드인의 창업자이면서 투자자로 활약했던 리드 호프만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호프만은 더 페이스북이 링크드인과 경쟁관계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투자 대신 전문 투자자인 피터 티엘을 소개해줍니다. 피터 티엘은 숀 파커와 마크 주거 버그를 만난 후 더 페이스북의 가치를 490만달러로 계산하고 50만달러를 대여형식으로 투자합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늘어나는 회원수 때문에 피터 티엘의 자금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다시 숀파커가 나서서 WTI로부터 30만달러를 대출받습니다.

WTI는 숀 파커를 통해서 더 페이스북의 진가를 알게 되고 회사에 투자를 하게 됩니다.

페이스북의 창업자들이 숀 파커를 특히 좋아했던 것은 투자를 받는데 엄격한 원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업자들이 투자자들에게 좌지우지 될 수 있는 상황을 애초에 피하고 철저히 자신들이 회사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받은 상태에서 투자를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2005년 2월이후

2005년 2월이 되자 더 페이스북의 가입자수는 200백만명을 넘어섰고 투자자들도 더 페이스북에 투자하기 위해서 안달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는 페이스북의 가치를 6000만달러로 인정하고 지분의 10%를 600만달러에 구입하겠다고 제안합니다. 비아컴에서는 더 페이스북을 7500만달러에 매입하겠다고 나서기까지 하였습니다. 여기에 엑셀파트너스가 더 페이스북의 존재를 알고 접근을 합니다. 엑셀 파트너스는 케빈 에프루시는 리드 호프만을 통해서 더 페이스북의 관계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고 리드 호프만은 숀파커를 소개해줍니다. 페이스북의 가능성을 높이산 액셀 파트너스는 워싱턴포스트와 투자협상이 마무리 단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몸이 달았습니다.

 

 

액셀 파트너서는 워싱턴 포스트보다 더 좋은 조건에 천 만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히게 됩니다.

마크 주커버그는 하버드 대학교 선배이기도 한 워싱턴포스트의 CEO인 돈 그레이엄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워싱턴 포스트의 투자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엑셀 파트너스가 페이스북의 가치를 9천 8백만달러로 인정하고 1천 2백 7()십만달러를 투자하겠다고 하자 결국 마크 주커버그는 엑셀 파트너스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이 투자를 통해서 마크 주커버그는 백만장자가 되었고 그동안 그를 괴롭혔던 자금 문제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더 페이스북은 투자를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가운데서도 승승장구 하였습니다. 2006년 12월 100만이었던 회원은 6월이 되자 300만명을 넘어설정도로 폭발적인 증가를 보였습니다. 안정된 자금덕분에 실리콘 밸리의 인재들도 속속 영입 할 수 있었다.

 

더 페이스북의 가장 큰 문제는 이용자수가 증가함에 따라서 발생하는 과부하였습니다. 인기있었던 인터넷 서비스들이 불안한 서버문제로 인해서 무너졌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더페이스북은 더욱 각별히 신경을 써서 서버관련 문제를 해결해 나갔습니다. 회사이름도 숀 파커의 제안에 따라서 더페이스북에서 정관사인 더를 빼고 페이스북으로 바뀌게 됩니다. 

마크 주커버그의 가치관

페이스북의 직원들은 자유롭게 작업을 합니다. CEO인 마크 주커버그조차도 슬리퍼를 신고 근무를 할 정도로 회사 분위기가 자유롭습니다.

마크 주커버그는 하버드대학 시절에도 규정이나 법에 구애 받지 않고 오로지 코드를 짜는 데에만 몰두 했습니다.

그리고 '온라인 상에서만이라도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 이라는 모토로 페이스북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정보와 자본의 소유, 지식의 독점을 누려왔던 기성세대와 달리, 마크 주커버그는 소통과 개방을 중시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가치관은 페이스북이 전세계 10억명이 넘는 사용자들을 유치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지려고 탐욕을 부리는 사람은 결국 아무 것도 갖지 못합니다.

2006년 야후가 마크 주커버그에게 10억 달러에 페이스북 인수를 제안했을 때도 거절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지금의 페이스북이 있었을까요?

페이스북의 큰 성공 뒤에는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의 올바른 가치관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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